스포츠/야구2010. 8. 6. 14:43
출처 : http://korea-baseball.com/kbo/bbs/board.php?bo_table=column_bbs&wr_id=31&page=3

안우준 기록위원 인터뷰
작성일 : 09-12-08 12:35






인터뷰 진행: 손윤, 배지헌, 안준철

인터뷰 정리: 박지혜, 고다영, 김정윤, 송세정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라는 말. 누구나 자주 쓰는 말이다. 클리셰다. 거의 "앵두 같은 입술"이나 "백옥 같은 피부" 수준이다. 이제는 닳고 닳아서 해지기 직전인 게 사실이다. 누군가에게 들려주면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느냐?"며 화를 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주 쓰이는 말이라고 해서 반드시 그만큼의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니다. 말로만 '기록의 스포츠'라고 할 뿐, 한국의 야구기록이 처한 상황은 매우 열악하기 때문이다. 가령 고교 대회에서 노히트노런(노히터)이 나왔을 때, 과연 그게 통산 몇 번째 노히터인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 과거의 아마야구 기록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도 옛 아마야구 기록지들은 한 구장의 창고에서 누군가가 정리해 주기만을 기다리며 '보존'되어 있는 중이다. 그런데 야구기록은 문화재가 아니다. '보존'이 아니라 '사용'되는 게 정상이다.


대한야구협회(KBA) 안우준 기록위원은 이런 현실을 누구보다 가슴아파 하는 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옛날 분들은 기록물 관련 개념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보안을 제대로 못 해서 분실된 것도 많다". 그래서 안 위원이 KBA로 이직한 뒤 제일 먼저 한 일이 "기록지를 책으로 묶어서 보관을 하고, 스캔도 뜨고, 2중 3중으로 보관"하는 작업이었다. 또 그는 "아마야구도 프로처럼 한 눈에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연감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기도 하다.


일당백. 프로에서 12명이 하는 일을 혼자서 수행하고 있는, 그래서 '힘들고' '한계에 부딪힐 때도 많지만' '앞으로는 나아질 것'이라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이가 안우준 기록위원이다. 오는 10일 열리는 대한야구협회 주최 2009 야구인의 밤 '우수직원상' 수상은, 안 위원의 열정과 노력에 대해 야구가 해줄 수 있는 대답 중 하나일지 모른다.


기록을 맡은 자의 슬픔


안 위원이 기록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야구의 도시인 부산, 그 중에서도 동래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자연스럽게 야구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학에서는 미생물학과를 전공한 그지만, "1997년부터 스포츠서울에서 명예기자로 활동"한 것을 계기로 야구계와 연을 맺게 됐고 결국 2000년 한국야구위원회(KBO)에 입사하며 '야구인'의 한 사람이 된다. 2003년부터는 프로-아마 교류의 일환으로 소속을 대한야구협회로 옮겨 기록 업무를 담당했다.


10년 가까이 기록 일을 하며 그가 지키려고 노력한 첫째 원칙은 '공정성'이다. 안 위원은 "사심 없이 기록하려고 한다. 선수 출신도 아니고 야구계에 선후배도 없다 보니 장점이 되기도 한다. 아마야구의 경우에도 기록 하나에 대학 진출이 걸리는 경우가 있어서 감독들이 기록원이 후배일 땐 부탁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면에서는 자유롭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물론 중립적으로 기록을 하더라도 난처한 상황은 생기게 마련. 안 위원에게 '가장 난처했던 순간'을 묻자, 히어로즈 투수 장원삼의 아마 시절 얘기를 들려줬다. "장원삼의 경성대와 홍익대와 시합이었을 거다. 경기 초반 홍대 선수가 기습번트를 대고 1루로 재빨리 달렸다. 장원삼이 쫓아가서 잡긴 했는데 잡자마자 한 바퀴 돌면서 땅에 공을 떨어뜨린 거다. 다른 기록원이면 어땠을지 모르겠는데, 나는 타자도 좌타자고 기습번트이고 타구 자체로 3루 라인 선상으로 가는 타구라서 안타로 기록을 했다. 그런데, 경기가 그 상태로 끝나버렸지 뭔가. 지금이야 프로에서 성공했으니 상관없지만, 사실 노히터란 건 투수 인생에서 한번 하기 어려운 거 아닌가. 자꾸 생각이 나더라."


순간적으로 벌어지는 상황을 재빠르게 판단해서 기록해야 한다는 것도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부분이다. 안우준 위원은 "감으로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서 "2루 쪽으로 타구가 가는데 2루수와 유격수 움직이고 심판 자리 옮기고 1루 주자가 2루로 뛰고 하면 사각지대가 생길 때가 있다. 게다가 동대문 야구장 외의 대부분 구장은 기록실이 1층에 있어서, 플레이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기록실에서 받침을 쌓아놓고 그 위에 올라가서 보기도 하고..."


아무래도 야구 기록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안타와 실책의 구분일 것이다. 안 위원은 어떤 기준으로 둘을 판단하고 있을까. 그의 대답은 '정석'에 가까웠다. "‘보통’의 타구인데 수비수가 미스를 했다면 실책을 주지만, 역동작이나 다이빙 캐치를 해야 하는 경우라면 웬만하면 안타로 기록한다." 다시 말해 타구가 보통의 수비로 잡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느냐를 기준으로 삼는다는 얘기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공식기록 주식에도 그런 조항이 명시되어 있"다. "타구에 대해 애매한 부분이나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에 있어서는 타자에게 유리하게 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는 것. 이는 투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논란이 된 김광현의 '비자책점'의 경우 '수비 기록은 투수에게 유리하게 한다'는 원칙에 의해 이뤄졌다는 게 안 위원의 설명이다.


물론 가장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경기흐름이나 상황이다. 강습타구 처리가 그렇다. 프로에서는 강습타구의 경우 안타를 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안 위원 말에 따르면 "아마야구는 강습타구라도 타구 속도나 힘이 프로보다는 떨어진다. 그래서 강습타구도 야수 정면일 경우, 흔히 말하는 알을 깐다거나 하는 때는 실책으로 하기도 하는 경우도 있다".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 기록을 하되, 게임 흐름을 보고 상황을 읽는 '눈'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가 생각하는 야구에서 기록의 가장 큰 의미는 영원히 남는 '역사'란 점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기록은 시대에 따라 계속 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희생번트의 개념이 대표적인 예다. "원래는 '처음부터 자세를 잡고 번트를 대는 것에 한해서 희생번트를 기록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자 희생번트를 기습번트처럼 대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희생번트인데 범타로 처리해서 타율을 까먹는 경우가 생기고, 항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최근에는 꼭 자세를 잡고 댄 번트가 아니라도 경기 상황을 봐서 희생번트로 기록하는 식으로 변화하게 됐다." 시즌 뒤 KBO와 구단 기록원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결과다. 몇 년 전부터 도입된 무관심 도루도 마찬가지다. 기록이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시대와 야구 스타일의 변화에 따라 '진화'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최근 야구계에 도입된 타이브레이크(일명 승부치기) 제도는 기록원들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대표적인 '필요악'이다. 안 위원은 "승부치기로 인해 기록 입력 프로그램도 수정이 필요해졌다"며 "기록적인 부분에서는 문제가 있는 게 사실"이라고 인정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승부치기에서 나온 기록은 다 인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투수 자책점 부분만 제외한다. 아마야구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게 대학진학문제가 걸려 있는데, 이미 기록한 홈런이나 안타 같은 걸 다 없는 셈 칠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안 위원은 "승부치기가 야구의 재미를 '업'시킨 면도 있다"면서 일장일단이 있다고 설명했다. 야구팬 출신다운 말이다.


프로와 아마추어


프로야구에서 아마야구로 옮긴 뒤에 겪은 어려움에 대해 묻자, "기록과 통계를 혼자서 다 처리해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프로에서는 기록을 프로그램에 입력하면 바로 통계 처리가 되지만, 여기서는 기록 담당이 혼자 뿐이라 1인 다역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루에 한 경기만 보면 그만인 프로야구와 달리, 많게는 하루 네 경기까지 기록을 해야 하는 것도 힘든 부분이다.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야구를 보는 셈이다. 그나마 나는 해외야구는 안 보는 편이지만, 저기 계신 팀장님(김용균 팀장)은 4경기 보고 집에 가서 또 메이저리그 보고 하신다. 하하."


물론 아마야구에서 프로 수준의 다양한 통계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아마추어라서 프로보다 공개를 덜 하는 것도 있지만, 학생야구인 것도 이유 중 하나다. 요즘 학교에서 학생들 성적표 공개 안하는 것과 비슷하다. 선수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학생이기도 하니까. 프로처럼 웹상에 누가 몇 타수 몇 안타 쳤는지 전부 공개하지는 않는다는 거다. 기록의 경우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진학을 한다거나 프로에 진출을 한다거나 할 경우, 개인적으로 요청을 하면 발급을 해 주고 있다." 또한 아마는 프로와 달리 게임 수가 몇 안 되기 때문에 프로에서 사용하는 각종 세부 통계가 크게 필요치 않은 점도 있다. 하지만 안 위원 혼자 정리하기에 벅찬 통계량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처음 KBO에서 대한야구협회로 옮길 당시만 해도, 안 위원에게는 큰 포부가 있었다. 서두에 언급한 창고의 낡은 기록 정리와 연감 발간이 바로 그것. 하지만 부족한 인력과 예산이 문제였다. "프로야구 기록원은 12~13명이고 업무도 역할이 분담이 돼서 딱딱 해나가면 되는데, 여기서는 기록 업무를 혼자 전담해야 한다. 기록을 확인할 때도 창고에 있는 기록지를 다 꺼내서 일일이 점검을 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무리가 있는 게 사실이다." 아마야구는 그만한 투자를 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설명이다.


이에 더해 기록물에 대한 한국 특유의 후진적인 인식도 어려움을 주는 부분이다. "프로야구 1982년도 제 1호기록지에보면 하도많이 꺼내보고 너덜너덜해져서 지금 코팅을 해놓은 상태다. 사실 코팅을 하면 안되는 거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된 고문서를 봐라. 원래 외형 그대로 다 누렇게 되어 있고 바스락거리지 않나. 코팅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훼손이다. 코팅한 사람이야 나름대로 뜻이 있어 했는지 몰라도, 1호 기록지가 코팅이 되어 있다는 건 문제가 있다."


게다가 아마야구 기록지의 경우 분실되거나 멸실된 것도 많고, 중요한 기록물을 야구인들이 빌려간 뒤 제대로 돌려주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다. "조만간 고척동 구장에 야구박물관이 생기게 되면 지금보다는 나아질 거라고 본다." 안 위원은 악전고투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새로 개발중인 기록 프로그램도 그런 긍정적인 생각의 일환이다. "협회 차원에서 전용 기록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지금은 1997년부터 쓰던 프로그램을 계속 쓰고 있는데, 개선이 필요해서 외주를 맡겼더니 비용이 너무 많이 나오더라. 결국 협회 내부에서 개발해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외에도 내년부터는 대학야구에서부터 기록과 통계 작업을 보다 체계화하는 것도 계획 중 하나다.


열악한 현실을 타개하려면 일반인들의 기록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다. 기록물의 중요성을 사람들이 깨닫고, 보다 많은 팬들이 야구 기록에 관심을 갖고 기록을 목표로 삼는다면 상황이 개선될 수 있지 않을까. "옛날에는 책을 사서 구입을 하는 것 말고는 기록에 대해 알아볼 방법이 없었지만, 지금은 맘만 먹으면 인터넷에 검색해서 기록 방법을 알아볼 수 있다. 또 경기 뒤에는 우리가 기록지를 스캔해서 웹에 올려놓으니까, 기록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도전해 봐도 좋겠다." 안 위원은 사회인 야구 등에서 직접 기록을 하려는 이들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일단은 전문적인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즐기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너무 전문적이고 복잡한 상황보다는 기초부터 하나씩 배워나가고 실제 경기와 대입하다보면 생각보다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취미를 잃었지만, 그래도 행복하다"

안우준 기록위원의 시작은 야구팬이었다. 취미도 야구였다. 사회인 야구를 하고, 야구장에서 좋아하는 팀을 응원하는 게 그의 낙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좋아하던 야구는 일이 된 상태. 부담이 되진 않을까?


안 위원은 "야구 보는 재미가 많이 줄어든 건 사실"이라며 웃었다. "플레이 플레이하나를 다 따지니까. 프로야구라도 맘 편하게 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생각을 하게 되더라. '아 저걸 왜 안타를 줬을까? 에러를 줬을까?' 하고 말이다." 휴일이 없는 것도 힘든 부분이다. "일요일에 일해야되고 남들 일할 때 휴일도 없고, 남들 일할 때 일해야하고 남들 쉴때도 일해야 되고. 아, 물론 쉴 땐 쉰다. 아예 안 쉬는 건 아니고. 하하."


취미였던 야구가 일이 된 만큼, 안 위원에게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옛날에 야구장 다닐 때는 영화보러 가는 사람들 보면 '왜 영화를 보러다니지? 영화 보러 갈 돈이 있으면 야구장에 가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지금은 쉴 때는 열심히 영화보러 다닌다. 하하. 야구는 야구고, 영화는 영화고, 그렇게 됐다." 하지만 야구광에게 다른 취미가 야구를 대신할 수는 없을 터. 취미를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게다.


끝으로 야구를 직업으로 삼은 게 '행복하냐'고 물었다. 인터뷰 내내 들은 얘기들로만 생각하면, 다른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힘들고, 휴일도 없고, 꿈꿨던 일은 현실적인 제약에 부딪히고, 게다가 취미까지 잃게 돼지 않았나. 하지만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안 위원의 마지막 말을 들어보자.


"그래도 야구와 함께 해서 행복했다고 생각한다. 야구장에서 생활하고, 어린 선수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야구와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자체가, 나에겐 고마운 일이다."


야구와 함께한 지난 시간들이 떠오르는 듯 안우준 위원은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지 주머니 속에서도 느껴질 법한, 은은하고 따뜻한 미소였다. 그가 느끼는 작은 행복이, 앞으로 한국 아마야구 기록의 발전으로 더 큰 행복이 되어 돌아오길 바랄 뿐이다. 안우준 기록위원의 수상을 다시 한번 축하한다.


Posted by 자개비